김택근 작가, 언론인

절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어떤 상(像)이나 그림이나 조각에 절을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경배의 대상이 무엇이든 그 간절함이 자신을 정화시킨다. 몸을 엎드리면 마음도 엎드려진다. 몸뚱이를 아래로 내던져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지은 삼업을 떨쳐내게 된다. 절을 하면 아만(我慢)이 사라진다. 절하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찾아온다.

몇 해 전 가야산 백련암을 찾았다. ‘성철 평전’을 쓰기 위해 스님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을 때였다. 백련암은 성철스님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삼천배를 시킨 곳이었다. 생전에 스님은 돈 보따리와 계급장은 일주문 밖에 걸어두고 알몸만 들어 오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법당에서 삼천배를 올려야 비로소 방문을 열어주었다. 스님은 저 언덕으로 떠나가시고 객이 들어 서성거렸다. 초가을 밤하늘은 맑았다. 마당에 별빛이 수북했다. 별빛을 조심스레 밟고 있으려니 홀연 법당 문이 열렸다. 그리고 삼천 배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얼굴엔 속기(俗氣)가 지워져 있었다.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초가을 한기와 별까지 삼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주 아래 지구라는 별에서, 그 아래 한 점도 안 되는 산 속에서, 그 속의 절에서, 또 그 속의 작은 법당에서, 작은 사람이 절을 하고 있었구나.”

삼천번 절을 한 사람들은 말했다. 자신의 잘남과 교만과 위선이 빠져나갔다고. 그리고 그 자리에 작은 한 인간이 나타났다고. 또 미천하고 연약한 자신을 품어준 존재들을 발견했다고. 자신을 낮추는 것보다 성스러운 것이 있을까. 절을 하면 비로소 이웃과 생명이 보인다. 그들이 곁에 있어 고맙다. 그들과의 동행이 곧 기쁨이다.

성철스님은 날마다 새벽에 절을 하며 이렇게 발원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드림은 제 스스로 복을 얻거나 천상에 머물 것을 구함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무상보리를 얻고자 함입니다.” 절은 기도이며 참회이다. 엎드려 절하는 사람에게 욕심이 붙어있을 수 없다. 절을 하면 요란한 삶의 장식품을 벗겨낼 수 있다. 우리는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앞세우며 이를 ‘자존’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고개를 세울수록 세파는 거세게 달려들고 마음은 요동칠 뿐이다. 절하라. 그러면 세상의 슬픔과 아픔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절은 절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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