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는 덕포동의 벽화 (좌). ‘꽃이 피어나는 소금길’이라는 이름과 달리 쓰레기가 쌓여있는 염리동 (우).

#아직 해가 뜨긴 이른 새벽 4시. 늦은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빠르다. 나도 그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한다. 후미진 골목길로 접어들자 가로등의 개수는 줄고 더 이상 CCTV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다. 심호흡한 뒤, 벽돌로 앞사람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내가 그 사람의 가방을 가지고 달아나는 동안 골목길은 고요할 뿐이었다.

가상의 범죄자가 삭막한 골목에서 범행을 저지르기까지의 과정을 구성한 것이다. 위의 상황처럼 낙후되고 후미진 장소는 언제나 범죄에 이용되기 쉽다. 이에 따라 최근 범죄자 개인이 아닌 범죄가 발생하는 환경에 주목하는 ‘환경 범죄학’이 대두되고 있다.
환경 범죄학은 범행이 발생할 수 있는 장소의 변화를 통해 범죄를 예방하고자 한다. 가로등이나 CCTV가 없는 골목 등과 같이, 앞서 가해자가 범행 결심을 굳히게 했던 환경을 변화시켜 범죄자의 범행 시도를 막는다는 취지다. 이것은 이른바 ‘셉테드(CE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라고 불리는 범죄 예방환경설계이다.
셉테드는 ▲주변을 잘 볼 수 있고 은폐장소를 최소화한 자연감시 ▲외부인과 부적절한 사람의 출입을 통제 ▲공간의 책임의식과 준법정신을 높이는 영역성 강화 ▲자연감시와 연계된 다양한 활동을 유도 ▲지속해서 안전한 환경을 유지라는 총 5가지 원칙을 통해 운영된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셉테드로는 후미진 골목길의 벽화, SOS 벨, CCTV 등을 들 수 있다.

변화한 사회구조, 셉테드의 등장
셉테드는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돼 1970년대 초 대중적으로 퍼져 나갔다. 국내에는 경기도 부천시가 2005년에 최초로 일반주택 단지를 셉테드 시범 지역으로 지정했다. 최근 경기도의회는 ‘경기도 범죄 예방도시환경 디자인 조례’를 제정해 경기도 범죄 예방 도시환경 디자인 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나 경찰 등 다양한 기관이 범죄로부터 안전한 생활환경 조성을 위해 셉테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셉테드 적용 사례로 부산 사상구 덕포동을 꼽을 수 있다. 덕포동은 지난 2012년 김길태 여중생 살인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과 부족한 CCTV의 수로 범인 검거는 장기화됐고, 이러한 덕포동의 환경은 범죄 발생의 큰 원인이 됐다는 의견이 일었다. 이후 덕포동은 2013년 범죄 예방 환경개선사업 지역으로 선정돼 지속해서 환경개선이 이뤄졌다.

우범지대에서 따뜻한 벽화마을로
덕포동 골목길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13구간에 120여 점이 넘으며 구간마다 다른 명칭이 붙었다. 각각의 명칭에 따라 그에 걸맞은 분위기의 벽화가 나타난다. 현재 덕포동의 셉테드 사업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덕포동에서 40년 이상 거주한 최대호 씨는 “(셉테드)사업을 하기 전에는 마을이 다소 어둡고 무서웠다”며 “마을에 벽화도 그리고 골목마다 CCTV도 설치하면서 한결 안전해진 것 같다”고 전했다. 실제로 곳곳에 셉테드를 적용한 부산 사상구 지역은 2014년 인구 1만 명 당 151.7건이던 5대 강력범죄가 2016년 114건으로 25% 감소했다.
셉테드의 효과에 대한 긍정적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여러 기관에서 앞다퉈 셉테드를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셉테드가 도입된 모든 지역이 덕포동과 같이 효과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떠난 민심, 방치된 시설
대표적인 지역으로 서울 마포구 ‘염리동 소금길’을 들 수 있다. 이곳은 잦은 범죄의 발생으로 대표적인 우범지역으로 손꼽혔지만, 2012년에 셉테드가 도입되며 마을 풍경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마을을 활성화할 수 있는 ‘소금길’ 산책로 지정, 안전지도 제작, 방범용 LED 번호 표시등 설치, 안심 주택 지정 등의 환경개선 방안이 도입됐다.
셉테드 설치 직후 염리동 소금길은 성공적인 셉테드 적용 사례로 거론됐지만, 현재 그 지역은 재개발로 인해 상당수 주택이 빈 상태다. 밝은 분위기의 소금길과 달리, 그 골목의 끝은 대규모 재개발로 인해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풍겼다. 이는 셉테드 구상단계에서 장기적인 도시 계획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염리동에서 50년 이상 거주한 한 주민은 “소금길 조성 사업을 시작할 때 마을 곳곳에 심어진 꽃이나 나무들이 지금은 다 죽어버렸다”며 “마을 주민들은 본인들 집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구청에서도 계속 유지보수를 잘 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소금길 계단 벽화의 페인트칠은 벗겨져 있었고 꾸며진 계단엔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었다.
우리대학 경찰행정학부 이창한 교수는 “셉테드의 5가지 원칙 중 유지보수 원칙은 특히 중요하다”며 “염리동 소금길의 경우 지자체, 경찰, 주민의 적은 관심으로 인해 유지보수가 잘 되지 않은 사례다”고 전했다. 장기적 도시계획 고려 부족, 유지보수의 소홀로 인해 염리동의 셉테드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실패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셉테드 성공, 삼박자 어우러져야
셉테드 프로젝트가 장기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지자체, 경찰, 주민 모두의 협력이 중요하다. 경찰은 CPO(Crime Prevention Officer)라 불리는 범죄 예방 진단팀을 결성했다. 전국의 모든 지방청에 설치된 CPO는 해당 지역이나 시설의 사회적·물리적 환경요인을 분석해 예방대책을 수립하고 지자체·민간과 긴밀한 협업으로 시설·환경 개선을 유도한다. 이들이 지역과 시설을 진단하면 지자체, 주민대표, 협력단체, 학술·연구단체 등으로 이뤄진 범죄 예방협의체가 논의 후 구체적인 개선방안을 결정한다.
지자체 또한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한다. 부산 사상구청 건축과 허혜영 주무관은 “지구대의 협조를 받아 지속적으로 유지관리실태점검을 실시한다”며 “현재까지 벽화와 같은 물리적 환경의 경우 양호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시설물 점검 및 관리를 위해 주민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의 노력을 한다”고 말했다. 지자체는 주민, 경찰 모두와 협력해 셉테드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찾으려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지자체, 경찰, 주민의 긴밀한 협조와 지속적인 관심이 존재해야 셉테드는 장기적으로 그 효과가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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