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걸음은 다름을 인정하고 제3의 길을 인지하는 것

▲쿤스트하우스 그라츠 작품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있는 사람들.

한 사회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관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그다음 세대에게 전달된다. 그중 가장 많이 사용되고 영향력 있는 방법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를 후대에 전한다. 하나는 내용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형식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해외취재 특별기획팀은 앞에 두 연재기사를 통해 세대를 거쳐 전달되고 있는 유럽의 가치관에 대해 다루었다. 교육을 통해 전달되는 직접적인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형식을 통해 전달되는 가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효율적인 내용 전달을 위해 이번 기사는 기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취재를 통해 얻은 인터뷰를 함께 사용하여 기사를 전개하고자 한다.

정답을 찾기 위한 노력

기자 본인이 겪어본 한국의 교육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험은 객관식 위주의 문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학생들은 오지선다형 문제 중 최대한 많은 정답을 맞혀야 한다. 정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반복될 경우 학생들은 시험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도 명확한 정답을 구하고자 할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명확한 답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가치관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한 가지 정답을 찾기 위한 행위의 반복으로 점철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나의 명확한 답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답은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답이고 다른 사람의 답은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토론은 매우 힘든 종목이다. 토론이란 서로의 견해 차이를 좁혀가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대화의 장이다. 하지만 자신이 정답인데 이를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태도로 일관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서로에게 고통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절대적인 기준을 규모로 측정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악으로 규정된다. 소수의 의견은 악으로서 없어져야 할 대상이 된다.
사람은 소수로서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다수의 편에서 안전함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튀는 것을 싫어하는 한국 사람의 경우 그러한 경향은 더 심하게 나타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바로 직업이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직업을 보면 육체 노동자보다 양복을 입고 자신의 책상에 앉아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직업을 많은 사람이 선호한다. 사회적인 시선이 그렇다. 자연스럽게 서비스나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수준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에 대다수의 학생은 화이트칼라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서도 많은 사람이 비슷한 길을 걷는다. 토익, 토플 등 영어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다양한 자격증을 딴다고 하지만 워드프로세서, 컴퓨터활용능력 등 대다수 취준생들이 같은 자격증을 갖고 있다. 즉 한국의 학생들은 목표에서부터 이를 이루려는 방법까지 획일화돼있다. 많은 사람이 좋다고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이 성공한 방법으로 자신도 같은 절차를 밟고자 하는 것이다.

주관성과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과연 유럽의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연세대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현재 그라츠 국립 음악예술대학교에서 지휘를 전공하고 있는 문주안 씨는 “제가 유럽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느낀 가장 첫 번째 차이점은 바로 공명(Resonance)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제가 가장 처음 배웠던 것 중 하나는 가장 예쁜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신만의 공명점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음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배우는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지만 저는 한국에서 이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했거든요. 한국은 기술적인 면을 더 강조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라며 두 문화 간 예술 교육의 차이를 설명했다.
‘가장 예쁜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신만의 공명점’은 ‘자신만의’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람마다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들었을 때 많은 사람이 예쁘게 듣는다면 이 또한 답으로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자신의 답이 아닌 다른 답이 있음을 인지하고 항상 또 다른 답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은 기술을 중요시한다. 기술은 할 수 ‘있다’와 ‘없다’로 나누어져 있다. 기술을 구현할 수 있으면 답이고 없으면 답이 아니다. 다시 이분법적인 인지가 적용되는 것이다.
직업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인식을 보아도 한국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은 ‘손님이 왕’이라는 말이 존재하듯이 서비스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을의 처지이다. 한국에서 손님은 ‘많은 가게 중 우리 가게를 와준 고마운 사람 따라서 잘 해주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유럽은 손님이라고 해서 갑이 아니다. 손님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얻기 위해 온 사람이고 가게는 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주체로서 동등한 관계가 형성된다. 직업에 있어서 선호도는 존재하겠지만 직종에 따른 귀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칼라가 주를 이루는 한국과 달리 유럽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다양한 직업이 존중받는 것이고 다양한 생각들이 존중받는 것이다.

‘다름’이 갖는 의미

사회는 화이트칼라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 또한 아니다. 사회는 지적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가 공존하고 자본가부터 노동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심지어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회는 경쟁을 통해 희소가치를 분배하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만 희소한 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목표를 이룬 사람들만 선이고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악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아직도 한국은 경쟁을 통해 불합리함이 정당화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부자인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아무리 크고 서비스직, 육체 노동자에 대한 시선이 아무리 좋지 않더라도 이는 경쟁에서 도태된 그들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한국에서 나타나는 문제와 갈등은 대립으로 귀결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성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준다. 대립을 넘어서는 또 다른 해결책, 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인정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다름을 인지하고 이에 대해 인정하는 태도를 바탕으로 희소가치만이 아닌 각자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변화해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부는 인문학 열풍은 다양성을 위한 좋은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선과 악이라는 개념으로 귀결되던 문제들과 해결방법들이 ‘왜?’라는 질문을 받기 때문이다.

▲문주안 씨가 유럽과 한국의 예술교육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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