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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길

기사승인 [1592호] 201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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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부처님 당시 사밧티에 ‘아힘사’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있었다. 아힘사는 ‘불해(不害)’ 즉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살인자가 된 데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그는 원래 어떤 바라문의 제자였다. 잘생긴 아힘사를 연모했던 사모님이 어느 날 그를 유혹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모님은 아힘사가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고 모함했다. 스승은 아힘사를 파멸시키기 위해 ‘불사(不死)의 법을 얻기 위해서는 백 명의 사람을 죽여 손가락 목걸이를 만들라’고 엉터리 교시를 내렸다. 꾐에 빠진 아힘사는 순식간에 99명의 사람을 죽였다. 도시는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손가락 목걸이를 만든다 하여 ‘앙굴리말라(指鬘)’라고 불렀다. 그가 어머니를 죽여 100명을 채우려는 순간 마침 부처님이 나타났다. 그는 어머니 대신 부처님을 죽이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겁한 중아. 도망가지 말고 거기 서라.’‘나는 여기 서 있는데 너는 나쁜 마음을 멈추지 못하는구나.’
정신이 돌아온 앙굴리말라는 칼을 내던지고 부처님 앞에 엎드렸다. 부처님은 그를 기원정사로 데리고 와서 머리를 깎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소문을 들은 파세나디 왕이 그를 체포하러 왔다. 부처님은 ‘여기에는 살인마 앙굴리말라는 없습니다. 착한 수행자 앙굴리말라가 있을 뿐입니다.’라며 웃었다. 왕은 부처님의 뜻을 알고 군사를 돌이켜 그냥 돌아갔다.
<앙굴리말라경>의 이 감동적 일화는 우리에게 무엇이 불교의 길인가를 다시 생각게 한다. 세속에서는 원칙과 권위를 중시한다. 모든 잘잘못을 따질 때 원칙에 부합되는가, 권위를 해치지 않는가가 잣대다. 법률이나 관습은 원칙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만능의 해결책은 아니다. 앙굴리말라의 살인은 스승 부부의 증오와 불법 교사(敎唆)가 배경이었다. 이렇듯 모든 범죄는 사회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원인과 동기는 무시한 채 결과만 따지면 원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불교가 자비와 관용을 가르치는 것은 용서만이 증오와 원망을 종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그동안 원칙이니 상식이니 하면서 얼마나 많이 서로를 미워했는가. 모든 다툼이나 증오는 나만 옳다는 아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는 그 반대의 길로 가라고 말한다. 불구대천의 살인자도 안아줄 때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하는 말이다. 미워한 사람이 있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악수하고 화해하자. 용서하고 안아주자. 그리하여 내년에는 서로 웃자.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저작권자 © 동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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