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배설물 포함. 신선하게 보존된 30g. 1961년 5월 깡통으로 생산’이라는 문구가 적힌 90개의 캔은 이탈리아 미술가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artist's shit)’이라는 작품이다. 현재까지도 ‘캔 안에 든 것이 진짜 똥이냐’는 논의가 활발한 이 작품은 캔 중 하나가 2007년 경매에서 12만4000유로(약 1억7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이게 미술이라고?”

사진기의 출현, 현대미술의 출발

현대미술의 태동은 ‘사진기의 출현’이었다.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 미술의 근본은 대상의 재현이었다. 당시 미술가들은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하지만 아무리 똑같이 그린다고 해도 사람이 사진기의 재현 능력을 따라가긴 역부족이었다. 대상을 똑같이 재현했다고 생각한 작품 역시 실제 사진과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작품에 작가의 주관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모방’의 역할을 사진기에 넘겨주고,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차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학과 정수경 교수는 “당시 작가들은 사진의 재현과 차별성을 모색하며 ‘탈 재현’을 향해 나아갔다”고 설명했다.


탈 재현의 시초는 빈센트 반 고흐와 폴 세잔으로 대표되는 후기인상파다. 반 고흐는 거친 붓 자국을 통해 본인의 정신적인 불안전함을 드러냈다.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서 고흐는 별빛을 강조하기 위해 직접 화폭에 물감을 짜서 색칠했으며 거친 붓 터치로 소용돌이에 생동감을 줬다. 또한 작품 표면을 매끄럽게 만드는 글레이징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투박한 붓 자국을 그대로 남겨 관람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줬다.


탈 재현을 직접 주장해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린 폴 세잔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다각도로 설정해 독특한 인상주의를 선보였다. 그는 하나의 시점으로 작품을 구성했던 형식에서 벗어나 여러 시점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이를 한 캔버스에 담았다. 대표적인 예로 작품「사과와 오렌지」가 있다. 그는 사과를 보는 시점을 위로 설정해 사과가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표현한 반면, 오렌지는 수평의 시점으로 바라봐 안정된 상태로 표현했다.


폴 세잔의 작품은 후대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세잔의 원근법과 다시점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계기로 피카소는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한 대상을 하나의 형태로 작품 속에 표현하게 됐다. 그의 작품 「우는 여인」①은 사람의 얼굴을 다양한 방향으로 관찰해 다른 형태로 보이는 눈, 코, 입 등을 하나의 얼굴 안에 표현했다.

①파블로 피카소,「우는 여인」캔버스에 유채, 60×49cm,1937.

회화의 대상, 외부에서 내면으로

 

대상의 재현에서 벗어나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려던 움직임은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추상회화로 이어졌다. 작가의 사상을 표현하는데 구체적인 대상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추상회화는 작가의 감정 표현 여부에 따라 기하학적 추상과 추상표현주의로 나뉜다. 기하학적 추상은 작품에서 작가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다. 대표적인 작가 피에트 몬드리안은 만물이 지닌 보편성이 순수한 미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품을 직선과 단순한 색으로 구성해 보편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의 작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②은 삼원색과 검은색 선만으로 구성된다.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을 순수한 형식으로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②피트 몬드리안,「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캔버스에 유채, 46×46cm,1930.

반면 추상표현주의는 작품에 작가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이러한 미술사조는 바실리 칸딘스키로부터 시작됐다. 칸딘스키는 음악의 선율이 감동을 주는 것처럼, 회화를 이루는 요소만으로도 감정이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부드러운 곡선과 강렬한 색채로 자유롭게 표현했다. 이는 칸딘스키가 연작한 즉흥 시리즈 중 「즉흥 7」③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작품은 어색한 색상 배치와 자유로운 붓놀림으로 그의 사상을 드러냈다.

③바실리 칸딘스키,「즉흥 7」캔버스에 유채, 60×49cm,1910.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로 평가받는 잭슨 폴록은 ‘액션 페인팅’이라는 미술기법을 사용했다. 액션 페인팅이란 캔버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물감을 흩뿌리는 표현 방식이다. 미국 미술계는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그의 내면을 잘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아른아른 빛나는 물질」④에서 액션 페인팅의 기법을 통해 무질서한 색채와 형태를 드러냈다. 이는 작가의 순수한 자아를 표출했다는 점에서 추상표현주의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국민대학교 미술학부 권기동 교수는 “추상표현주의는 이전의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④잭슨 폴록,「아른아른 빛나는 물질」캔버스에 유채, 76.3×61.6cm,1946.

‘선택’도 예술이 되는 시대

현대미술이 난해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로 ‘추상표현주의 미술’과 함께 일상의 사물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는 ‘오브제 미술’이 거론된다. 오브제 미술은 ‘예술가가 직접 만들지 않아도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방아쇠를 당겼다. 이 물음의 효시는 마르셀 뒤샹의 작품 「샘」⑤이다. 

⑤마르셀 뒤샹,「샘」혼합재료, 63×48×35cm,1917.

1917년 뒤샹은 남성용 소변기를 뒤집어 ‘샘’이라는 제목을 지은 후,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있던 독립전(The Independent Exhibition)에 가명으로 출품한다. 이 전시는 참가비 6달러만 내면 어떤 작품이든 전시할 수 있음을 약속했지만,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의 전시를 거부했다. 


뒤샹의 「샘」이 미술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소변기는 저속하다는 것’과 ‘소변기는 작가의 어떤 행위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뒤샹은 그가 공동편집위원으로 있던 미술잡지 ‘맹인(The Blind Man)’에 무기명으로 항의성 기고문을 작성했다. 그는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샘’은 부도덕하지 않으며, 배관 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작품의 제작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을 선택한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선택’됨으로써 그것의 본래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제작’이 아닌 ‘선택’만으로도 미술이 된다는 뒤샹의 주장은 기존의 미학적 가치의 근간을 흔들었다. 작품의 급을 매기는 것을 넘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예술 철학적 질문을 던진 것이다. 

 

"미술은 이제 ‘모방’의 테크닉을 벗어나오로지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

 


그렇다면 뒤샹은 왜 하필 ‘소변기’를 선택했을까? 정 수경 교수는 “‘선택’이란 개인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매우 중요한 행위”라며 “뒤샹이 미술품으로 소변기를 선택한 이유는 소변기가 뒤샹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배관 기관이 열악했던 프랑스 출신 뒤샹에게는 뉴욕의 ‘콸콸’ 내려가는 소변기가 ‘샘’이라는 제목을 지어줄 만큼 충격적이었다는 것이다.


「샘」의 등장 이후, 오브제 미술은 현대미술의 모든 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오브제 미술을 어려워한다. 이에 대해 정수경 교수는 “작가의 오브제에 대한 경험과 감상자의 경험이 일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어도 개인적으로 그 작품을 좋게 평가할 의무는 없다”고 말했다. 작품의 설명을 들어도 작가의 경험이 내 경험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감정적 동요가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과 작가의 공감대가 겹쳐 나에게 감정적 동요를 주는 오브제를 감상하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조언했다.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해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현대미술,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지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봤다. 권기동 교수는 많은 이들이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이유에 대해 “미술작품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며, 작품을 감상할 때 배경 지식이 없어도 감정적 동요가 생기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전문가는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걸 안다고 생각하는 건 많은 이들이 범하는 실수”라며 단순히 미술을 즐기면 된다고 조언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작품을 감상해야 할까? 권기동 교수는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을 나누는 기준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작품을 고르는 기준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좋은 작품이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고, 관객 역시 느끼는 바가 있는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Perfect Lovers」를 예로 들었다. 이 작품은 공장에서 생산된 두 개의 시계가 벽에 걸려있는 오브제 미술이다. 두 시계는 서로 같은 속도로 흐르다 점점 시차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멀어지는 연인을 의미한다. 그는 “대량생산된 벽시계라는 일상적인 물건을 사용했지만, 시간이나 사랑, 삶에 대해서 성찰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수경 교수는 미술작품 감상을 소개팅에 비유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이성을 만나볼 수 없듯이 미술작품을 전부 볼 수도, 볼 필요도 없다”며 “마음에 드는 작품만 골라 봐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또한 “스펙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해서 그 작품을 꼭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전했다. 그 역시 몇 시간 동안 감상하게 되는 작품이 있는 반면, 아무리 유명해도 전혀 감흥이 일지 않는 작품도 많다고 말했다. 
덧붙여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간다면 굳이 작품 해설이나 전문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대신 작품에 담긴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 후에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면 작품 해설이나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것을 조언했다. 또한 내가 끌리고 알고 싶은 작품을 모아 나만의 작품 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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