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영화 ‘증인’(2019).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 ‘증인’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대사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카메라를 빤히 응시하며 말한다. 이는 영화를 보고 있는 관람객들에게도 물음을 던지는 듯하다. 관람객들이 입을 모아 명대사로 뽑을 만큼,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 대사였다. 이로 인해 순간 우리는 ‘나는 좋은 사람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과연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증인’의 주인공 순호는 ‘좋은 사람’을 택했다. 그는 원래 어려운 이들을 돕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신념은 잠시 접어둔 채로 그저 돈을 많이 버는 변호사가 되고자 한다. 이후 순호는 대형 로펌에 취직한다. 그는 의뢰인인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라는 회사의 지시에 따라 변호한다. 하지만 그는 죄가 없다고 믿었던 피고인이 진범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순호는 변호사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담당 검사를 찾아가 피고인의 유죄를 밝히려 한다. 그러나 검사가 교체되는 등 진실을 덮으려는 압력이 이어지고, 결국 그는 재판장에서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사리사욕보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정의를 택했다. 이러한 선택은 순호가 더는 로펌에서 일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변호사라는 직업까지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것을 감수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진실을 밝혀 정의를 구현한 순호는 영화 속에서 ‘좋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 생업을 포기하는 그의 모습에 쉽게 공감하기란 어렵다. 이러한 극적인 전개는 ‘통쾌하다’고 생각하기에는 뭔가 찝찝하며 ‘뻔한 영화’라는 평이 나오는 계기가 된다. 현실의 우리들도 순호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에 ‘그렇다’고 쉽게 답하기란 분명 어려울 것이다. 수년 간 노력해 얻은 직업을 잃고 다시 바닥부터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누군가 불의를 택할지라도 그 개인만을 맹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좋음’을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사회는 가혹하다. 우린 이런 선택을 하도록 만든 사회적 구조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실제 우리 사회의 사람들은 선과 악, 이상과 현실,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매번 선택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하려면 적당히 때가 묻어야 해”라는 대사가 있다. 이는 대사뿐만이 아니라 실제 일상의 대화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맨손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음은 이미 만연한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는 데에만 그친다. ‘좋음’을 향한 열망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사용돼야 한다. 현실의 벽 앞에 선 사람들뿐 만이 아닌 현실의 벽 그 자체에도 주목해야 한다. 구조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모이면 사회를 변화시킬 원동력이 된다. 그 원동력으로 변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더욱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를 통해 결국 우리는 ‘좋은 사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사회에서 개인들이 비로소 ‘좋음’을 실현할 수 있다. 우리는 끝없이 되물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일까.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