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국문문창18)

 1년 전 3월, 우리대학은 ‘새로운 봄’을 향한 투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대학 신문 3월호를 읽는 독자층은 으레 신입생일 것이라는 필자의 짧은 식견 아래, 덧붙이자면 이 투쟁은 바로 우리대학 청소 노동자 투쟁이다. 직접고용을 주 골자로 내건 청소 노동자들의 파업과 본관 점거 농성, 대대적인 삭발식이 있었다. 많은 학생과 교수가 지지하고 연대 성명을 냈다. 하지만 파업 투쟁으로 인한 불편을 호소하며 청소 노동자들에게 거센 비난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비난의 이유는 대개 ‘학습권 침해’였다.
 최근 서울대학교의 기계·전기 노동자 파업과 관련해 어떤 소식을 듣고는 불쾌한 기시감에 휩싸이게 됐다. 해당 대학 도서관장을 맡은 교수가 한 신문사에 “학생들의 미래를 인질로 투쟁하는 나라엔 희망이 없다”라는 내용의 칼럼을 기고했다는 것이다. 상황은 똑같다. 노동자의 파업권과 학생·교수의 학습권이 충돌하고 있다. YS 정부 이후 정형화된 자본주의적 대학에서 시간은 돈과 다름없다. 학생은 대학에 돈을 내고, 교수는 대학에서 돈을 번다. 이들이 대학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은 돈과 연결돼 있다. 따라서 일면으로는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학생들이 돈을 쓰는 시간과 교수들이 돈을 버는 시간을 방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상,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경제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남다르거나 유난인 사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교육열이 치열한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주류일 소지가 다분하다. 더불어 ‘대학생’이 주장하는 학습권이라는 윤리적 테제에는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가져야 하는 특수한 경제적 과업의 압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아야 하고, 어떤 이는 빨리 고시에 합격해서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노동이 없는 곳엔 학습도 없다. 우리가 온전한 우리의 성과라고 믿는 사실들의 대부분은 직·간접적인 타인의 노동으로 말미암아 가능했던 것들이다. 학습은 개인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노동으로 마련된 불 켜진 따뜻한 도서관과 쾌적한 공공 화장실이 없었다면 학문적 과업 달성에 난항을 겪지 않았겠는가. 불교의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생각해 보라. 노동권과 학습권은 함께 보장될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현장 앞과 책상 앞은 결코 배타적인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습권 침해’는 특정한 이유로 학습에 어려움이 있을 때 유효성을 가진다. 물론 현상적으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학습권을 침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제3의 요인이 노동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연쇄 효과로 학습권까지 침해를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학습권 침해 주장은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아닌, 학습을 위한 사회적 노동 운용의 원활한 흐름을 저해하고 있는 측에게 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것이 학습권을 보장받는 진정한 길이다.
 서울대 노사는 지난 12일 교섭을 타결했다. 그러나 서울대 교수의 칼럼은 두고두고 세간에 오르내릴 것이다. 학생들의 미래를 인질로 투쟁하는 나라. 이 주장이야말로 노동자의 권리를 인질로 공부하는 나라의 학자가 보여주는 학습권 투쟁의 어처구니없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힘들게 공부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을 사회적 약자로서 가련히 여기는 그의 칼럼에는 진실로 학생들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탈꼰대화’하고 싶어 하는 기성세대의 오만이 담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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