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법학과 교수

공식적으로는 법대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레이텍’이라고 불리는 오픈소스 프로그램의 패키지 개발자이기도 하다. 레이텍은 컴퓨터로 조판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식자공이라는 직업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활자들을 배열해서 읽기 편하도록 책의 페이지를 판짜기 하는 장인들 말이다. 그 식자공이 하는 일을 컴퓨터가 대신한다고 보면 된다. 활자들은 컴퓨터 폰트 속에 들어있다. 한마디로 레이텍은 저자에게서 원고를 받아 폰트를 재료로 이를 책이나 논문으로 만들어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라 하겠다.
지금 이 원고는 아래아한글에서 작성하고 있다. 한국 대학가에서 아래아한글이 차지하고 있는 준 독점적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고 있지만, 사실 아래아한글은 주어진 그대로 사용했을 때 읽기 편한 아름다운 결과물을 보여준다고 하기 어렵다. 레이텍은 처음 배울 때는 약간의 장벽이 없지 않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멋진 문서를 효율적으로 만들어준다. 수학식 조판에 특히 탁월해서 이공계 전공자들에게는 거의 필수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들었다.
최근에 한글 단어나 구절들을 가나다순으로 정렬하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작성할 일이 생겼다. 책을 만들다 보면 찾아보기, 한자어로 흔히 색인이라 불리는 것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다. 이를 위해선 가나다 정렬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임의의 한글 단어의 정렬은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현대 한글만 쓰였다면 비교적 수월하겠지만 한글은 때로 자모들의 조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강’이라는 글자는 ㄱ, ㅏ, ㅇ, 이렇게 자모 세 개의 연속으로 나타낼 수 있다. 현대에 잘 쓰이지 않는 옛 한글의 표기에는 후자의 자모조합 방법이 유일한 길이다. 문제는 현대한글과 옛한글 모두를 아우르는 한글 정렬 알고리듬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약간의 인터넷 검색을 거쳐 “정보교환용 한글 처리 지침”이라는 표준문서에 한글 정렬 알고리듬이 제시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표준문서를 얻기 위해 한국표준정보망에 접속하였을 때 적잖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연한 케이에스 표준문서를 돈을 받고 팔고 있었던 것이다. 오프라인으로 인쇄물을 배송하는 서비스야 유료가 당연하겠지만, 온라인으로 피디에프 파일을 열람하는 것조차 일정한 금전을 지불해야 했다. 물론 큰 금액은 아니었다. 문제는 금액의 다과가 아니라 그 배경에 자리한 철학, 아니 철학의 부재인 것이다.
표준은 일종의 법이다. 어떤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어떤 행위가 불인되는지 정해놓은 지침이 곧 법이라면, 표준도 데이터교환에서 어떤 정보가 허용되고 어떤 정보가 불허되는지 정해놓은 지침으로 널리 법이라 할 수 있다. 법이 있어 사회적 행위 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듯, 표준이 있어 정보 처리 장치 간 정보교환이 가능해진다. 법을 어기면 형벌이나 강제집행 등 제재를 받고, 표준을 어기면 ‘깨진 글자’ 등 소통단절의 제재를 받는다. 형법, 민법 등을 일정 수준 이상의 유산자 시민들만 볼 수 있게 한다는 게 현대사회에서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표준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유롭게 표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추가적인 인터넷 검색을 통해 문제의 국가표준문서는 영어로 번역되어 국제표준기관에 제출된 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완전히 공개되어 있는 이 영어번역본을 참고하여 결국 한글 정렬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있었지만, 씁쓸한 느낌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덧붙이건대, 필자는 표준문서에 제시된 정렬 알고리듬을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한 법의 자구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엄격히 구속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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