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운 법률사무소 지담 변호사.

대형 산재 참사가 터졌을 때, 언론은 나름의 원인 규명에 나선다. 그때 꼭 등장하는 단어가 ‘안전불감증’이다. 나는 이 말이 참 싫다. 취지는 알겠다. 현장에서 나타난 각종 부주의와 관리·감독상 문제들이 결국 다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 때문이라 할 수는 있겠다. 근데 그래서 어쩌자고? 뜻이 통한다고 다 옳은 말은 아니다.

안전불감증은 ‘위험지각이 낮은 상태’,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따위를 말한다. 산재 문제를 ‘다 함께 노력해서 치유해야 할 사회적 병증’ 정도로 본다. 과연 이게 노력한다고 치유되는 병일까?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게 있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유사한 원인으로 발생하는 수십 번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통계 법칙이다. 1 : 29 : 300 법칙이라고도 한다. 1명의 중상자가 나오기까지 같은 원인에 의한 29명의 경상자와 같은 위험에 노출되었지만 사고는 피했던 300명의 잠재적 부상자가 나오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뒤집으면 비슷한 위험 상황에서도 29명은 경상에 그치고 300명에게는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은 어쩌면 모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심리 아닐까.

그러니 안전불감증은 일종의 ‘상수’다.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안전불감증을 치유하자고 할 게 아니라 그것을 전제한 대책이 나와야 한다. 환경오염의 원인이 사람이지만 사람을 없애자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다. 노동자들의 사망이 안전불감증 때문이라는 말은 그들의 사망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우리 사회가 그냥 떠안고 살아야 하는 문제라는 말처럼 들린다. 사람의 생명이 사회 유지나 경제 발전을 위해 응당 치러야 할 비용이 돼버린 것 같다.

언론은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습관적으로 ‘안전불감증’을 말한다. 이 말이 싫은 더 큰 이유는 쓰이는 맥락 때문이다. 원인을 흐트러뜨리고 책임을 분산시킨다. 이번 '한익스프레스 산재 참사'(이천 물류창고 화재)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인화성 물질 가득한 밀폐된 공간에서 환기 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일을 시켰다. 그래서 불이 붙었고 노동자 38명이 사망했다. 이건 병이 아니라 범죄다. ‘사회적 병증’이 아니라 ‘사업주의 범죄’로 보는 게 옳다. 그런데도 안전불감증 타령이다. 안전불감증 강조하는 언론치고 기업 규제나 사업주 처벌 강화를 강조하는 언론은 없다.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징벌적 손해배상, 안전보건 규제 강화 등을 외친 게 몇 년째인가. 그 법들을 다 ‘기업 규제’ 법이라 퉁쳐서 ‘기업 죽이는’ 법으로 만들고, 결국 ‘경제 어렵게 만드는’ 법이라며 번번이 반대했던 자들은 또 누구인가. 그들이 또 ‘안전불감증’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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