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연두색 새싹이 핀 봄은 점차 초록색의 싱그러운 잎사귀를 자랑하는 여름이 돼간다. 이번 호에서는 푸르고, 수줍고, 강렬했던 생멸과 순환의 시간을 포착해 봤다.

 

봄의 끝과 여름의 입구 사이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장미다. 계절을 안내하는 모양이 꼭 신호등같이 느껴진다. 따가운 햇빛에 볼이 빨갛게 익어갈 즈음, 초록색 담벼락에도 불그스름한 꽃봉오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작은 봉오리는 이내 탐스러운 붉은 꽃잎을 활짝 펼쳐낸다.

 

계절의 순환을 알리는  담벼락의 장미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장미가 만개했다.(사진=장미희 기자.)

 

빨간 꽃과 청록 잎의 대비는 꼭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마주한 듯한 강렬한 느낌을 줘서 발걸음을 멎게 한다. 장미를 바라보면 특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반이 갈린 채 수박의 붉은 속살과 녹색의 껍질을 동시에 보여 주는 ‘삶이여 영원하라(Viva la Vida, 1954)’는 작품이 떠오른다.
이 작품을 완성한 프리다는 얼마 뒤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삶이 영원하길 바랐지만, 그의 육신은 부패를 앞둔 수박처럼 영원할 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프리다가 느낀 ‘삶’이란 생과 멸의 ‘단절’이기보다 ‘순환’이었을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은 순환한다. 꽃이 지고 다시 흙이 돼 새로운 꽃을 피워내듯 봄은 가지만 여름이 다시 그 자리를 채우며 만물을 순환 시킨다.

 

▲떨어진 장미 꽃잎이 바닥에 쌓인다.(사진=장미희 기자.)

 

초록으로 그린(Green) 세상

 

▲녹색 잎을 전등에 비춰보면 물관이 보인다.(사진=장미희 기자.)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날. 초록색이 유난히 더 싱그럽게 느껴진다. 누런 잎을 털어낸 나무에는 푸릇한 새잎이 일렁였고 갈색으로 말라 있던 돌 틈의 이끼는 겨우내 아껴둔 청록색 벨벳 옷을 꺼내 입었다.

 

▲축축한 돌 틈에 이끼가 피어 있다.(사진=장미희 기자.)


포도는 한여름 무더위에 보라색으로 익어가기를 기다리며 맑은 빛을 자랑하고, 담쟁이도 낙엽 지는 가을이 오기 전 초록 잎을 마음껏 즐긴다. 한 초등학교에서 조그만 화분에 심어진 옥수수를 봤는데 작은 손으로 모종을 심었을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포도가 익기 전 열매는 잎과 같은 연두색이다.(사진=장미희 기자.)

▲서울 중구 소재 초등학교 화단에 난 옥수수.(사진=장미희 기자.)

 

본격적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더위

 

따뜻하다 못해 점점 뜨거워지는 날씨에 카페에서도 더운 음료보다 시원한 음료에 손이 간다. 차가운 컵에 올망졸망 맺히는 물방울을 보니 탁 트인 바다가 생각난다.

 

▲덥고 습한 공기는 컵 벽면의 물방울이 됐다.(사진=장미희 기자.)

 

먼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짭짤한 바닷바람은 끈적이지만, 그 안엔 바닷바람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청량감이 숨겨져 있어 좋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바다 앞에선 따가운 햇빛도 즐거운 고통으로 느껴진다.

 

▲모래사장 뒤로 펼쳐진 푸른 바다가 아름답다.(사진=장미희 기자.)


요새 들어 비가 자주 내리는데 이것은 무작정 슬프기보다 다가올 태풍을 천천히 준비하라는 친절한 안내같이 느껴져 정겹기까지 하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창문엔 온 세상이 일그러진다.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탈바꿈한다는 점이 정말 재밌다.

 

토독토독 튀어 오르는 비와 기억

 

▲비 내리는 창문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사진=장미희 기자.)

 

하지만 창을 내리고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바라보자면 조금은 우울해진다. ‘양말까지 푹 젖지 않을까’란 생각을 시작으로 애써 숨겨뒀던 고민거리가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 온 뒤 다시 맑게 갠 하늘을 보면 또 다른 감정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는 설렘에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기도 한다.

 

▲전날 비로 만들어진 물웅덩이에 비친 전선.(사진=장미희 기자.)

 

비가 내린 다음 날의 조금 서늘한 날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홀로 편의점에서의 맥주 한 캔을 떠올리게 한다. 고된 일과의 끝과 약간의 쌀쌀함은 최고의 안주가 된다.

 

▲비 온 뒤 쌀쌀한 날씨엔 캔 맥주가 제격이다.(사진=장미희 기자.)


투박하면서도 특별한 느낌 때문인지 포장마차는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고단함을 씻어 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진짜 피로를 풀어내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피로를 더 쌓고 있는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편의점 뒤로 노천가게의 사람들이 보인다.(사진=장미희 기자.)

 

오후 여섯 시가 지나도 쉬이 저물지 않는 해를 보면 길어진 낮이 실감 난다.

 

해가 흘리고 간 부스러기를 줍는 나

 

▲창밖엔 해가 완전히 지기 전 푸른 빛이 느껴진다.(사진=장미희 기자.)

 

밤이 짧아질수록 어둠을 향하는 여정은 더욱 소중하다. 특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 하늘을 보는 것이 즐겁다. 다양한 색채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푸른 기운이 점점 붉어졌다가 옅은 보라가 되었다가 곧 칠흑 같은 암흑이 된다.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 오묘한 색감과 변화를 제한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울뿐더러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어 항상 안타까움이 남는다. 의자에 앉아서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자니 생각과 감정이 뒤엉킨다.

 

▲저물어가는 하늘에는 다양한 색을 볼 수 있다.(사진=장미희 기자.)


자연에는 다양한 색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눈에 띄는 몇 가지 색만을 고르고 골라  단어로 정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억지로 색을 정의하면서까지 갈등을 일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을 바라보듯 시야를 조금 더 넓혀본다면, 그 속엔 색을 정의하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다양한 색이 공존하는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해 질 녘, 우리 함께 봄과 여름 사이의 하늘을 바라보며 삶과 계절의 연속성을 포착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늘을 향해 뻗어 본 손.(사진=장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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