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연두색 새싹이 핀 봄은 점차 초록색의 싱그러운 잎사귀를 자랑하는 여름이 돼간다. 이번 호에서는 푸르고, 수줍고, 강렬했던 생멸과 순환의 시간을 포착해 봤다.
봄의 끝과 여름의 입구 사이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장미다. 계절을 안내하는 모양이 꼭 신호등같이 느껴진다. 따가운 햇빛에 볼이 빨갛게 익어갈 즈음, 초록색 담벼락에도 불그스름한 꽃봉오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작은 봉오리는 이내 탐스러운 붉은 꽃잎을 활짝 펼쳐낸다.
계절의 순환을 알리는 담벼락의 장미
빨간 꽃과 청록 잎의 대비는 꼭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마주한 듯한 강렬한 느낌을 줘서 발걸음을 멎게 한다. 장미를 바라보면 특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반이 갈린 채 수박의 붉은 속살과 녹색의 껍질을 동시에 보여 주는 ‘삶이여 영원하라(Viva la Vida, 1954)’는 작품이 떠오른다.
이 작품을 완성한 프리다는 얼마 뒤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삶이 영원하길 바랐지만, 그의 육신은 부패를 앞둔 수박처럼 영원할 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프리다가 느낀 ‘삶’이란 생과 멸의 ‘단절’이기보다 ‘순환’이었을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은 순환한다. 꽃이 지고 다시 흙이 돼 새로운 꽃을 피워내듯 봄은 가지만 여름이 다시 그 자리를 채우며 만물을 순환 시킨다.
초록으로 그린(Green) 세상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날. 초록색이 유난히 더 싱그럽게 느껴진다. 누런 잎을 털어낸 나무에는 푸릇한 새잎이 일렁였고 갈색으로 말라 있던 돌 틈의 이끼는 겨우내 아껴둔 청록색 벨벳 옷을 꺼내 입었다.
포도는 한여름 무더위에 보라색으로 익어가기를 기다리며 맑은 빛을 자랑하고, 담쟁이도 낙엽 지는 가을이 오기 전 초록 잎을 마음껏 즐긴다. 한 초등학교에서 조그만 화분에 심어진 옥수수를 봤는데 작은 손으로 모종을 심었을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본격적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더위
따뜻하다 못해 점점 뜨거워지는 날씨에 카페에서도 더운 음료보다 시원한 음료에 손이 간다. 차가운 컵에 올망졸망 맺히는 물방울을 보니 탁 트인 바다가 생각난다.
먼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짭짤한 바닷바람은 끈적이지만, 그 안엔 바닷바람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청량감이 숨겨져 있어 좋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바다 앞에선 따가운 햇빛도 즐거운 고통으로 느껴진다.
요새 들어 비가 자주 내리는데 이것은 무작정 슬프기보다 다가올 태풍을 천천히 준비하라는 친절한 안내같이 느껴져 정겹기까지 하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창문엔 온 세상이 일그러진다.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탈바꿈한다는 점이 정말 재밌다.
토독토독 튀어 오르는 비와 기억
하지만 창을 내리고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바라보자면 조금은 우울해진다. ‘양말까지 푹 젖지 않을까’란 생각을 시작으로 애써 숨겨뒀던 고민거리가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 온 뒤 다시 맑게 갠 하늘을 보면 또 다른 감정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는 설렘에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기도 한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의 조금 서늘한 날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홀로 편의점에서의 맥주 한 캔을 떠올리게 한다. 고된 일과의 끝과 약간의 쌀쌀함은 최고의 안주가 된다.
투박하면서도 특별한 느낌 때문인지 포장마차는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고단함을 씻어 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진짜 피로를 풀어내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피로를 더 쌓고 있는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오후 여섯 시가 지나도 쉬이 저물지 않는 해를 보면 길어진 낮이 실감 난다.
해가 흘리고 간 부스러기를 줍는 나
밤이 짧아질수록 어둠을 향하는 여정은 더욱 소중하다. 특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 하늘을 보는 것이 즐겁다. 다양한 색채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푸른 기운이 점점 붉어졌다가 옅은 보라가 되었다가 곧 칠흑 같은 암흑이 된다.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 오묘한 색감과 변화를 제한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울뿐더러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어 항상 안타까움이 남는다. 의자에 앉아서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자니 생각과 감정이 뒤엉킨다.
자연에는 다양한 색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눈에 띄는 몇 가지 색만을 고르고 골라 단어로 정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억지로 색을 정의하면서까지 갈등을 일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을 바라보듯 시야를 조금 더 넓혀본다면, 그 속엔 색을 정의하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다양한 색이 공존하는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해 질 녘, 우리 함께 봄과 여름 사이의 하늘을 바라보며 삶과 계절의 연속성을 포착해보는 것은 어떨까?